왕과 기사

퍼시벌x지크프리트


*메인스토리 2부의 설정과 이런저런 동인 설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퍼시벌 왕.”

“어서 오시오, 지크프리트.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군.”

“멀리서부터 가신 분들이 맞이해주신 덕분에 불편은 없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잠시간 차분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대는 정말이지 변함이 없는 것 같군.”

“후후, 쇠하지 않기 위해 정진하고 있는 몸입니다. 폐하께서도 변함이 없으시군요. 무엇보다 강녕하시니 기쁜 일입니다.”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이 함께였던 날로부터의 이야기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의 겉모습에 한해서는 사실이 아니었다. 붉은 왕이라 불리는 퍼시벌의 머리칼은 그 타는 듯한 빛을 잃었고 용살자 지크프리트 또한 완만한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두 사람의 사이에 허례 따위를 원치 않았다. 그저 눈동자 너머로 비치는 것을 볼 뿐이었다.

”그대를 이렇게 보내주신 아서 왕께 감사를 전해야겠군. 별고는 없으신가?”

“예. 외람되지만, 여전히 혈기가 넘치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나라의 왕을 묘사하기에 조금 어색한 수식이지만 두 사람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병아리였던 소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부푼 꿈을 가지고 무작정 왕도로 상경했다는, 언제나 해맑게 가르침을 청하던 수습 기사. 대련을 할 때면 단짝과 함께 몇 번이고 포기를 모른 채 덤벼오던 모습이 그들의 눈에 선했다.

그랬던 아서가 페드라헤의 왕으로 즉위한 지도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과거에 느꼈던 대견함은 의식적으로 마음 한구석에 밀어두었다. 그러나 공통의 기억을 가진 이들이 모여 아서의 이름을 담을 때면 자연히 그런 감정을 떠올리곤 한다.

“아서 왕께서 보내신 친서는 여기에.”

지크프리트가 꺼내 든 문서는 근위 기사의 손을 거쳐 국왕에게로 전달되었다. 친서의 뒷면에는 페드라헤의 문장과 함께 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과연.”

서로 다른 공역에 있을지언정 한때 국왕이 몸담은 곳이라는 깊은 인연 덕에 빈번히 교류 중인 나라의 일이다. 이미 예상하던 내용이기에 표정에 놀라움은 비치지 않았지만, 그의 입속에는 씁쓸함이 맴돌았다.

“이 건에는 신중하게 답을 드리도록 하겠소. 그때까지 편히 지내주시게.”

“감사드립니다.”

왕의 손을 벗어난 친서는 다시 가볍게 봉해져 한 고관에게 맡겨졌다. 페드라헤의 기사는 그것이 곧 코르베닉의 안녕을 책임지는 대신들의 일대 과제가 될 예정임을 짐작했다.

“그래……. 지크프리트, 그대만 괜찮다면 이 나라의 차를 대접하고 싶군. 부디 함께해주겠나.“

“물론,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깊이 고개를 숙인 지크프리트의 앞에서 퍼시벌이 몸을 일으켰다. 각자의 입장에 선 그들에게 허락된 대화의 시간은 겉으로든, 그 뒤로든 극히 짧은 시간뿐이었다.



“지크프리트. 편히 말해다오.”

“과분한 배려군요.”

“그렇게 들리나?”

“동맹국이라 해도, 타국의 무장과 거리낌 없어서야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겠지. 더군다나 내게는 대역죄인의 칭호까지 있잖나.”

다소 짓궂은 대답이지만 지크프리트의 어조는 담담했다. 이제는 언급되지 않는 과거의 누명이지만 이 나라의 아무도 그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지크프리트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들은 왕궁의 한 자락에 있는 웨일즈 양식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방에서 담화를 시작했다. 곁에 시립한 이들은 지크프리트도 안면이 있는, 오랜 시간 왕의 곁을 충직히 지켜온 심복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친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격식 없는 대화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제 나는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다. 따끔한 말에 익숙해져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일이지.”

“훌륭한 신하를 뒀다는 배부른 투정이군.”

퍼시벌은 자랑스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떤가, 이 나라는. 네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뒤로 변한 것도 적지 않을 터.”

‘대부상(大浮上)’이 일어난 지도 30여 년이 흘렀다. 하늘을 분단하던 장류역이 소실되고 붉은 지평이 떠오르며 펼쳐진 새로운 삶의 터전들. 코르베닉은 그중 하나에 자리 잡은 신생 국가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이 땅에 문명의 흔적조차 없었다는 건 이제는 역사 속의 이야기였다.

지크프리트는 왕궁에 도달하기까지 눈에 담은 광경들을 떠올렸다. 정비된 거리의 모습. 그곳에는 땅의 민족의 기술이 도시 근간부터 녹아있어 많은 이들이 편리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다. 공공연한 사실은 아니지만 ‘조직’과의 협력으로 달로부터 유래한 운영 체계를 융합한 점도 땅의 기술의 정밀도를 올리는 큰 이점이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라 전반에 오랜 국가들과 비슷한 양식이 사용되어 타국인에게도 이질감이 적은 편이었다. 기술을 과시하려는 나라들을 보아온 지크프리트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이 나라의 모습을 꽤 반갑게 느꼈다.

그런 눈부신 발전 속에서도 모두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 누구나 웃을 수 있는 나라, 그런 이상향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네가 목표로 하는 나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더군.”

기사는 지금의 이 나라를 퍼시벌의 이상과 가깝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그를 향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한계이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훗, 후한 평가로군. 여기까지 온 것도 나와 함께 걸어준 모든 이들의 덕분이다. 하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지…….”

테이블 주위로 향긋한 차의 향기가 감돌았다. 왕과 기사는 주변인의 안부를 전하고 축하와 유감, 그리고 공감을 나눴다. 타국에서 온 사자의 입맛을 고려해 그리 달지 않은 다과가 준비되어 있지만 둘 중 누구도 짧은 시간을 그것에게 할애하진 않았다. 나라. 일상. 인연. 기억.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을 골라 풀어두는 그들의 입가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함께했다.

“폐하.”

묵묵히 왕을 보좌하고 있던 엘룬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그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가. 시간은 참으로 빠르군. 어느 순간부터 늘 그래왔지.”

퍼시벌은 찻잔 바닥에 남은 붉은 액체에 시선을 향했다. 이번 만남의 마지막 ‘대화’가 될 지금 꺼낼 수 있는 말. 그는 한 나라의 왕이자 한때의 기사, 그 양쪽으로서 오랜 인연을 마주하기로 했다.

“……종종 요제프 님을 떠올린다. 그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리고 이전에 그분은 어떤 마음으로 선택을 하셨는지 말이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떤 기억을 헤아리는지, 오랜 시간 그와 다른 길을 걸어온 지크프리트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기사는 깊은숨을 내쉬는 왕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날의 기억들은 내게 빛나는 것이지. 덕분에 나는 이곳에 설 수 있었다. 네게도 감사하고 있다, 지크프리트.”

“그 빛은 네 힘으로 쌓아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감사를 들을 필요는 없겠지만…….”

지크프리트는 좀처럼 다음으로 꺼낼 말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 그럴 수 있으리라 여긴 것보다 긴 시간을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에 서툰 사람이었다.

“……고맙다, 퍼시벌.”

마지막으로 부른 그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은 듯,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국의 왕 앞에서 고개 숙였다. 그의 표정은 이 왕궁에서 보인 그 어떤 모습과도 사뭇 달라져 있었다.

“폐하.”

“듣고 있소.”

“저는 제 옛 주군과 폐하를 같은 선상에서 경애합니다. 제 충성은 페드라헤와 아서 왕의 것이지만, 이 마음 또한 진심임을 알아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기사는 조금 전까지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말을 왕에게 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을 꺼내기 전, 그는 굳게 눈을 감아버렸다.

“……부디, 페드라헤의 목소리에 답해주시길.”

붉은 왕의 표정이 굳었다.

새삼스러운 상처는 없었다. 다만 그들 모두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