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글로베일 님.”
“나가라. 아무도,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
낮게 깔린 음성은 언뜻 평정으로 착각할 만큼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빙황의 시선은 오직 방 안에 놓인 가족의 초상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게 누구건 내게 얼굴을 보이지 마라. 나가라. 지금 당장.”
수없는 각오를 다지며 이 자리에 섰던 방문객이 입을 열 틈 따위는 없었다. 분노를 받아낼 대상조차 되지 못한 이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침통한 얼굴의 흑발 청년이 이끄는 대로 무거운 감정을 삼키고 물러났다. 그 누구의 잠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고 불청객의 인기척이 멀어진다. 그렇게 그곳에는 한 때 이 방의 주인이었던 이와 그의 혈육만이 남았다.
숨소리조차 없는 침묵 속에서 아글로베일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냥한 음성은 어린 그에게 당부했었다. 맏형인 네가 어린 동생들을 지켜주고, 서로를 지탱해 주어야 한다고. 그 말에 담긴 사랑을 알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 또한 가족을 사랑했기에 소년은 책임을 마음에 새겼다. 작았던 동생들이 자라나고 하나둘 떠나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이자 기둥으로 남아있었다. 그랬을 터인데.
“어머니, 저는……”
그가 끝맺지 못한 말은 상냥한 당부의 목소리를 가려버렸다. 다시 차가운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더는 떠나간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그는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퍼시벌은 전투 중 동료를 지키고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전해 들었다. 그것이 영웅적인 희생이었는지, 자신의 기량을 과신한 무모함의 결과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뻔뻔하게도 이곳에 발을 들인 퍼시벌의 ‘가신’은 그의 마지막을 전하려 했을 터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말을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기껏 동생이 구한 목숨을 용납할 수 없게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더 많은 것을 이뤘어야 하는 동생이다. 과분한 이상을 말하면서도 견실히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맏이의 눈에 얼마나 대견했던가. 그야말로 불과 얼음처럼 이 형제에게는 서로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빙황은 자신이 물려받지 못한 종류의 상냥함을 어리석게도, 사랑스럽게도 여겼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상냥함을 내버려두었기에 지금의 결과가 찾아왔다. 가족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보호자로서 그는 자신의 올바른 책임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했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고 몇 번이고 숨이 막혀오는 사이 어느새 흐느낌에 가까워진 감정이 아글로베일의 목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일국의 군주로서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순간임을 자각하면서도 그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변해버린 동생을 마주하는 일조차 아직 해내지 못한 그였다.
형과 동생. 막냇동생의 방이었던 그곳에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랬을 터였다.
“아그 형. 그렇게만 있으면 퍼시가 외롭잖아.”
갑작스럽게 그를 향한 낯익은 음색. 아글로베일은 이 방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들은 그의 놀란 시선을 마주 보지 않는다. 그중 둘째인 라모락은 반쯤 무릎을 꿇은 채로 막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당연한 의문이 아글로베일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 있을 이유만은 확실했기에 그는 아무런 물음을 꺼내지 않았다.
두 혈육을 향해 발을 딛는 짧은 사이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서늘하게 맴돈다.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라에 매여있지도 않은 너는 어째서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는지. 다음에 모습을 비추는 건 마지막 장례식 때일 것인지. 잘못된 방향의 분노임을 그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잘못되어 있지 않던가?
“미안해, 아그 형.”
애초부터 입 밖에 낼 수 없던 말들이 잘게 부스러졌다. 가까이서 내려다본 라모락의 얼굴은 차라리 울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이런 아우의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일을 겪고 무엇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는, 이제는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청년이지만 아글로베일에게 있어서는 역시 사랑하는 가족이다. 울컥 쏟아내고 싶은 감정을 밀어 넣고서 형제의 맏이는 그 사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렇게는 생각하는 거냐.”
“응. 퍼시에게도. 후회는…… 못하지만. 나한테도 이루고 싶은 게 있으니까.”
라모락의 너머로 보이는 퍼시벌의 모습은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했다. 조금은 느슨해졌던 아글로베일의 표정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만다. 잠시간 숨을 멈췄던 그는 결국 오랜 물음을 입에 담았다.
“그것들이 웨일즈보다도. 여기 있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고개를 든 라모락은 형의 말이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그의 어깨로 형제 누구와도 닮지 않은 옅은 밤색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전부 소중해.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 그렇잖아.”
이해하지 못할 형님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라모락은 서글픈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어째서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먼저 떠나버리는 걸까.”
“……. ……그렇군.”
뜻밖에도 그 뒤 라모락이 꺼낸 건 먼 추억의 이야기였다. 두 어린 동생의 장난에 짐짓 화를 내던 맏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웃음을 짓던 어머니와 웨일즈의 아들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차분히 타일러주셨던 아버지. 희미해진 가족의 시간은 추억을 공유하는 이의 언어 속에서 되살아난다. 다만 그때의 밝았던 감정은 빛이 바랜 채였다.
“사실 그건 퍼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데. 하자고 한 건 나여서 말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그날 밤에 퍼시벌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내게 알려줬으니까.”
허를 찔린 듯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라모락은 평온한 퍼시벌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 그런 녀석이었지. 모처럼 놀려주려고 했는데 잘 안됐네.”
그 얼굴을 향해 뻗었던 손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동생에게 닿는 일 없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맏형의 마음 따위는 모르는 채로, 라모락은 예의 그 서글픈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아글로베일과 마주 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여기서 날 잡을 거야?”
“너는 집에 돌아왔을 뿐인 가족이다. 난폭한 짓을 할 도리는 없지.”
이미 지나간 고민이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만난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겠다. 그러니 언제든 돌아와라, 라모락.”
탕아는 가족의 당부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바람을 위해 다시금 집을 떠나갈 뿐이었다.
“퍼시를 잘 부탁해. 음…….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떠맡겨서 미안하지만 조금은 쉬고. 형한테 필요한 건 그거니까.”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잠시 고민하던 둘째는 어릴 적과 같이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죽지 마, 아그 형.”
“너야말로.”
형제들은 마지막 작별과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라는 작별을 나눴다. 세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날의 일이었다.